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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있어도 살아있는 사람'▶산남의진’ 의병장 정용기▶새해 1월의 독립운동가
  • 기사등록 2020-01-10 22: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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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문화원 앞에 세워져 있는 산남의진 비


[강병찬 기자]

국가보훈처가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 의병대장 출신 정용기 선생을 선정했다.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이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자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한 달간 개최하고 있다.


1862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정용기 선생은 1887년 아버지 정환직이 벼슬에 오르자 함께 상경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고종은 부친 정환직을 불러 군주를 대신해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에 대해 이야기하며 밀지를 내렸다.


정환직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정용기도 함께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1906년 영천으로 간 정용기는 영천창의소를 설치해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고, 같은 해 2월 의병 1,000여명의 추대로 의병 대장이 됐다. ‘영남지역 의진’이란 뜻의 ‘산남의진’을 이름으로 정해 본격적인 항쟁을 준비했다.


같은 해 4월 아버지 정환직이 경주에 구금됐다는 소식을 들은 정용기는 급히 경주로 향했지만 이는 산남의진을 막기 위한 관군의 계략이었다.


정용기는 경주진위대에 체포돼 대구경무소에 구금된 후 4개월뒤 풀려났다. 그후 일제가 만든 외채를 국민의 손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봄 산남의진을 다시 조직하고 7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포항 청하와 영천 자양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9월 포항 죽장으로 이동해 입암계곡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일본군에게 역습을 당해 정용기를 비롯한 많은 의병이 전사했다.


정부는 지난 1962년 정용기 선생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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