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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칼럼] 영천성 수복, 역사 이면 찾아야▶임진왜란은 ‘난(亂)이 아닌 전쟁’
  • 기사등록 2020-01-16 20: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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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칼럼▶김문길 부산 외국어대 명예교수(철학/학술학 박사)


◆김문길 박사일본국립교토대학대학원 일본문화연구

영천성수복 연구승자의 소리도 귀중하지만 패자의 소리도 들어야

임진·정유재란‘임진·정유전쟁’이라 해야


428년 전 임진·정유년을 일본력에서는 문록(文祿)·경장(慶長)년이라 한다.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용어다. 임진년과 정유년에 일어난 ‘전쟁’을 ‘난(亂)’이라 했는데, 난은 나라 안에 무슨 재앙이 있을 때 ‘난리났다’고 하는 용어이다.


일본에서는 14세기 각 지방에 무사들이 자주 ‘난’을 일으켰다. 그래서 일본 역사서에는 ‘난’ 이란 기록이 많다.
조선사를 연구한 이들은 일제 강제 합병 후 일본사람들이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을 설립하고 조선사연구를 먼저 착수해서 우리 주권과 역사를 축소 왜곡시키면서 전쟁을 난이라 했다고 말한다. 일본사람이 만든 용어를 지금까지 쓰고 있다. 따라서 임진·정유재란을 ‘임진·정유전쟁’이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영천성 수복에 있어서 많은 예산을 들어 세미나를 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알찬 내용을 가지고 쉽게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영천성 수복을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영천성만 수복된 것은 아니다. 임진전쟁 때 조선 팔도에 수복된 지역이 많다. 그리고 수복은 다시 찾았다는 의미이다. 다시 찾았다면 언제 어떻게 해서 성(城)을 빼앗기게 됐나는 이유도 연구해야 한다.


필자는 영천성이 빼앗긴 원인과 수복한 이유를 몇 가지 논하고자 한다. 영천성이 함락된 때는 1592년 4월 22일 오후,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임진전쟁에 제2진으로 부산포에 침입한 가토 기요마사와 나베시마 나오시게 병역 2만2,800여명이나 되는 거대한 부대가 1592년 4월 14일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2진 양산 경주 영천에 침입하여 이틀 만에 영천성을 빼앗았다. 그때 영천성은 싸움도 하지 않고 성이 점령된 패전이었다.


그 이전에 조정에서는 임진전쟁은 있을 것이다 혹은 없을 것이다로 당파 싸움만 했고, 지방 유림들도 전쟁을 막을 준비를 하지 않았다. 영천성도 방치된 상태였다. 영천성을 점령한 가토군과 나베시마 군은 신령·의성·영주·강원도로 진격하고, 점령한 영천성은 후쿠시마 나오노리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임진전쟁이 치열해짐에 명나라 군대가 지원해왔다. 조선에 진격, 북진해서 침공했던 가토군과 나베시마군은 남하를 했다. 그즈음 7월 22일 권응수 의병장을 비롯한 지역의 의병들이 조직됐다. 군관 김윤국도 군을 일으켜 가담했다. 1592년 7월 26일 새벽에 의병장 권응수가 지휘하고 선봉장 홍천재(洪天齋)는 3팀을 구성하여 빼앗긴 성을 공격했다. 영천성 좌군은 신해(申海) 장군이 맡았고, 우군은 최문병(崔文炳) 장군이 맡았고, 중군은 정대임(鄭大任) 장군이 맡았다. 참아종사(지휘소)의 정세아(鄭世雅)·정담(鄭湛) 장군이 신호를 울릴 때 화포를 쏘며, 의병 3,500여명이 일제히 담을 넘어 왜병을 결박하거나 죽이고 무기를 노획하니 남은 병사들은 도망하고 말았다. 영천성은 드디어 수복됐다.


수복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창의정신으로 조직을 잘했다는 것. 둘째, 영천에서 우수한 화포가 제작·사용됐다는 것. 셋째, 왜군들이 군량미가 없어서 상당히 굶주리고 있을 때 성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1997년11, 혜안)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다. 전쟁 시 우리 문화와 우리 문화인을 많이 잡아가서 일본은 부를 축적했다. 전쟁 와중에 군사들이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쌀을 많이 훔쳐오라고 해서 왜장들은 굶주린 몸이지만 조선 각 처 농가에서 쌀을 빼앗아 일본에 보냈다. 필자는 한 문서(주인장 : 증명서)를 발견했다. 문서에는 조선 쌀을 30가마니를 보내니까 받아 주세요. 라고 쓰여있다.(문서 참조)


그러니 영천성에 왜군들이 먹을 것이 없지만, 명령에 식량 쌀을 보냈다는 것은 약탈전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토요토미는 일본 국내에서도 100여년간 전쟁이 계속됐고, 농민을 선발하여 전쟁에 내보내다 보니 국내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다시 문서를 보내면서 군량미가 부족하니 조선 현지에서 농작물을 빼앗아 자조·자급하고 식량을 아끼라고 나베시마에게 보낸 문서도 있다.


영천성은 후쿠시마 나오스케에 군대가 패배한 것이다. 나베시마는 패전했지만 타지역에서는 업적이 다양하고 지금도 히로시마현에 후쿠야마에는 후쿠시마 성이 잘 조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영천성수복에 관한 세미나 연구나 전시 등은 우리나라 사료, 우리 의병장들의 후손이 만든 문헌을 가지고 연구 발표되고 있다. 승자의 소리도 귀중하지만 패자의 소리도 들어야 한다. 연구자들이 거의 한국사 동양사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역사 패자들의 후손이 쓴 일본사료를 연구 분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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