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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하 칼럼] 행복한 귀농, “농사는 기다림이다”
  • 기사등록 2020-08-02 21: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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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오인하 논설위원(초대 전국귀농연합회장)


오늘 글의 주제는 무더운 여름 날씨 만큼이나 무겁다.  ‘기다림’이다.  생명산업인 농업은 조급함이 아닌 ‘기다림’과 인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더워도 가을은 온다. 무더운 여름에 땀 흘리고 풍성한 가을(추수)을 기다리는 게 농부의 일상이다.


지난 7월16일이 초복(初伏)이다. 내가 귀농하기 전 초복은 삼복(三伏)중 하나로 삼계탕으로 몸보신하는 날인줄 알았다. 그런데 귀농해서 보니 초복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져 왔다.


초복(初伏)의 사전적 의미는 삼복(三伏)의 첫째다. 여름철 몹시 더운 기간을 초복(初伏)·중복(中伏)·말복(末伏)으로 나눈 것 중 첫 번째로 하지(夏至)로부터 세 번째 경일(庚日)이다.


그런데 귀농해서 알게 된 것은 벼가 자라는데 초복·중복·말복을 지나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귀농한지 만 2년이 되어서다. 그래서 나는 삼복이 더 없이 고맙고 기다려진다.


귀농 둘 째 해에 나는 흑 찰벼를 심었다. 그 흔한 유기농 농법으로. 무지하게 우렁이도 넣고 피를 뽑는데 올인 했다. 처음 피(잡초)를 뽑는다니 옆 논 어르신이 웃었다.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어 어르신을 무시하고 끈질기게 매일 아침 네다섯 시 부터 부지런히 뽑았다. 나중에는 “제초제를 뿌리면 이 고생을 안 할 텐데” 하시던 어르신이 “올가을 추수하면 나한테 한가마니만 팔게” 하셨다.


긴 기다림 끝에 어르신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기다림의 농업 미학 덕분이다.  그래서 나는 삼복더위가 고맙다. 삼복의 무더위를 이기고 기다린 끝에 흑 찰벼가 고개 숙이며 농부에게 다가온다는 작은 깨달음이다.


한번은 2013년 칠월의 토요일 수도권 예비 귀농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도중 한분이 “무엇이 행복한 귀농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움찔했다.  그러다 내가 경험한 흑 찰벼가 언뜻 떠올랐다. “자신에게 주어진 농사가 자아의 만족과 기쁨이 된다”면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씨 뿌리고 땀 흘려 기다리면 돈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농업은 씨 뿌리고 땀 흘려 기다리는 미학이다”고 말하고 “조급하게 농사로 성공하고 싶거나 빨리 돈을 벌고 싶다면 차라리 사업이나 공장을 운영하는 게 더 빠르다”고 덧붙였다.


보잘 것 없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흑 찰벼 논에 잡초(피)를 느리게 하나하나 제거하고 나니 한고랑 한고랑이 모두 흑 찰벼로만 남았다. 하늘 한번 쳐다 보고 그 결과(추수)를 기다리며 마음의 미소를 짓는 그 행복함 자체가 농업이라는 것도 이때 알았다. 욕심 부리지 않고 느리게 가는 기다림의 과정이다.


이따금씩 곡식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다. 허리가 굽고 육신은 고달팠지만 내가 갖는 흑 찰벼에 애정으로 사랑을 속삭였다.  “건강하게 자라주어서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슬렁슬렁 “나도 주인님을 사랑한다”며 머리를 흔들며 기다려 달라는 소리가 가을 실바람을 타고 귓전에 들려온다. 이 모두 조급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라는 충고로 들렸다.


삼복은 물 수렁에 한발 한발 힘든 땀방울의 고통이지만 여름을 지나 풍성한 가을을 기다리게 하는 자연의 섭리다. 그래서 나는 여름 삼복이 무척이나 고맙고 기다려진다. 무덥고 긴 여름을 지나 기다리면 가을에 흑 찰벼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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