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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교수, 또 한 번 日 정부 비밀문서 공개...日 대해령 53·56호 최초 공개 - 광복 후 조선인 1호 귀국선 우끼시마호,日 의도된 폭침...1호 귀국선 최종 목…
  • 기사등록 2023-08-16 21:28:55
  • 수정 2023-08-16 22: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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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투데이=장지수 기자]

김문길 교수, 또 한 번 日 정부 비밀문서 공개...

日 대해령 53·56호 최초 공개

영천북부교회 창립 68주년 및 광복절 기념 특강

조선인 1호 귀국선 우끼시마호,日 의도된 폭침

타이타닉 2500명, 1호 귀국선 우끼시마 8500명

우끼시마호 대해령 52호 어기고 강제 출항 폭침

1호 귀국선 최종 목적지 부산 아니었다. 기록 有

출항 2시간 30분 전 폭발물 하역 명령어긴 출항


▲ 지난 13일 영천북부교회서 일본이 공개를 꺼리는 비밀 문서 대해령 53호와 56호 공개 특강을 하고 있는 김문길 교수(전 부산 외대 명예교수, 한일문화연구 소장) (사진/장지수 기자)


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를 찾아 전국을 순회하며 일본의 전쟁 실상을 알리는 본지 객원논설 김문길(부산 외대 명예교수) 박사가 13일 경북 영천에서 광복절 78주년 기념 특강을 실시했다. (사진)


기독교인인 김 교수는 이날 영천북부교회 교인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권영길 담임 목사의 초청으로 교회 창립 68주년 기념을 겸해 자신이 입수한 美 연합군 발신(수신:日 토요타 후쿠다케) 대해령 53호와 56호를 잇따라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 영천북부교회(권영길 목사) (사진/장지수 기자)


이 문서는 미연합 군에 항복한 일본이 패전 선언(8월 15일) 후 8월 21일(대해령 52호), 22일(53호), 27일(56호)에 수신한 문서로 조선으로 귀국하는 1호 귀국선(우끼시마 마루호)에 대한 폭발 우려에 따른 운항 금지와 관련돼 있다. 52호는 앞서 지난 8월 9일 본지에 공개한 바 있지만 53호와 56호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김 교수는 "이같은 문서를 종합하면 1호 귀국선 우끼시마마루(우끼시마호)는 일본의 의도적 자폭이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김 박사의 강의에 따르면 이 배에는 8000여 명의 조선인이 승선해 있었다. 해상 사고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타이타닉(승선 2500명)에 비해 무려 3배가량 많은 숫자다.


사고 후 日 정부는 승선 인원은 3735명, 기뢰로 사망한 524명(일본 기관병 24명 포함)으로 발표했다. 당시 명단 없이 콩나물시루처럼 신고 없이 승선한 사람이 일본이 기록한 승선 인원보다 두 배나 더 많았다는 것이다.


日 정부는 이를 숨겼지만, 부산일보는 당시 "8000여 명이 타고 오던 우끼시마호가 폭발로 침몰했다"라고 적고 있다.


귀국선 1호 우끼시마호는 1945.8.22 오후 10시에 홋카이도 시모키다 오미나도 항에서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상선을 개조한 일본 최대 4730t(톤)급 군함이다.


앞서 공개된 대해령 52호는 우끼시마호 출항 하루 전인 8.21 일왕의 칙어로 군령부 총장(군사령관) 토요다 후쿠타케에게 내려진 문서다. 8.22 18시 이후에는 항공 선박 운항 중지 명령이다. 이미 출항한 선박은 안전한 곳에 정박해 훈시를 따르라는 명령도 포함됐다.


그러나 이를 어기고 출항한 우끼시마호는 경도 마이즈루항을 지나면서 폭파됐다. 마이즈루항에는 미군이 600여 기뢰(機雷)를 깔아놓고 제거하지 못한 곳이다. 日 정부는 "기뢰에 폭파됐다"라며 미국에 그 책임을 전가했다.


당시 우끼시마호에는 대량의 폭발물이 실려있었다. 항복 후 하역하지 않은 폭발물이다. 전쟁 물자 운송본부는 전보 3070호로 우끼시마호 선장 도리카이가네오에게 폭발물 하역을 명령했다. 우끼시마호 출항 2시간 30분 전인 1945.8.22 17시 30분이다. 하지만 그대로 출항해 폭파됐다.


당시 생존 일본 기관병과 강제징용자들은 하나같이 "기뢰 폭발이면 쾅! 소리가 한 번 일 텐데 세 번이나 연달아 났다. 싣고 온 폭발물을 의도적으로 폭파한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출항 직전 같은(22일) 날 우끼시마호 日 기관병 240여 명도 승선 반대 집회를 했다. 일종의 항명이다. 이유는 우끼시마호의 목적지는 부산이 아니라 마이즈루항이다. 우리는 폭침으로 죽고 싶지 않다"라는 게 승선 반대 집회 이유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두고 김 교수는 "당시 패전 후 일왕을 위한 옥쇄운동이 일어났는데 우끼시마호에 승선한 日 기관병들은 일본 천황과 일본을 위해 자결(自決) 맹세하고 승선했다."라는 기록도 확보됐다고 밝혔다.


▲ 소화20년(1945년) 8월 22일 대해령 53호 (김문길 교수 제공)


소화 20년 1945.8.22 대해령 53호는 일본은 무장을 해제하고 더 이상 전쟁은 하지 말라는 명령인데 우끼시마호는 폭발물을 소지한 채 출항했다.


우끼시마호가 폭침된 후 8.27 대해령 56호가 추가 발령됐다. 폭침 3일 후다. 우끼시마호 폭침은 일본의 자폭임을 알고 내린 명령이다. 즉 "동남·남서·조선방면 등 10개 방향 함대는 전면적으로 정전(停戰)을 실시하라"라는 명령이다. 더 이상 희생을 금지하기 위한 문서 명령이다.


김 교수는 대해령 53호와 56호를 분석해 보면 "일본은 항복(8.15) 후에도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서약으로 차출된 군인들이라 죽은 후 야스쿠니신사에 묻히도록 보장된 자결(自決)조직이 국수적으로 전쟁을 이어가면서 강제징용자들을 사살했다"라고 분석했다.


이같이 日 정부가 공개하기 꺼리는 대해령 53·56호는 지난 2018년 김 교수가 일본 방위성 소관 자료실에서 입수한 것으로 이날 자신의 고향인 영천북부교회서 처음 공개했다.

▲ 소화20년(1945년) 8월 27일 대해령 56호 (김문길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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