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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김문길 박사의 「일본 속 조선 역사 연구」...1800명 조선인 귀·코 무덤 공개 - 일본 내 조선인 귀·코 무덤 12만 명 추정...김 박사, "국내서 관심 가져야 할 …
  • 기사등록 2023-11-26 22:08:41
  • 수정 2023-11-26 22: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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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투데이=장지수 기자]

김문길 박사의 「일본 속 조선 역사 연구」...1800명 조선인 귀·코 무덤 공개

구마모토현 영국사(永國寺) 입구 석탑

울산 사람...『가토문전 청정공행장』 기록

일본 내 조선인 귀·코 무덤 12만 명 추정

김 박사, "국내서 관심 가져야 할 때"


▲ 1400년대 건립된 일본 구마모토현 영국사(永國寺) 입구에 세워진 조선인 1800명의 귀·코 무덤 안내판(뒷쪽은 석탑) (제공/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임진왜란 때 왜장들이 전리품으로 조선 장수의 코와 귀를 베어간 흔적(무덤)이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명예교수(한일문화연구소장)에 의해 일본에서 또다시 발견됐다.


때문에 김 박사는 "국내에서도 당시 일본의 이같은 만행의 전쟁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며 지적했다.


<영천투데이> 논설 김문길(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박사는 "1400년대 세워진 일본 구마모토현 영국사(永國寺) 입구에 조선인 1800명의 귀·코 무덤 석탑을 발견했다"라며 지난 22일 공개하고 26일 자세한 내역을 본지에 전달해 왔다.


▲ 김문길 박사 (사진은 지난 8월 13일 경북 영천북부교회서 광복절 78주년을 맞아 일본이 공개를 꺼리는 비밀 문서 대해령 53호와 56호 공개 특강 모습) (사진/장지수 기자)


김 박사가 일본에서 발견한 조선인 귀와 코 무덤 흔적은 이번이 여섯 번째다.


김 박사는 1979년부터 10년간 일본 교도대학과 고베대학에서 일본문화와 문학연구(일본사)를 해오면서 지금까지 40여 년간 일본 속에서 찾은 한·일 역사 자료와 日 정부가 공개를 꺼리는 비밀문서 등을 발견해 왔다.


특히 그는 교토대학 문학부 초빙교수로 재직한 후 1995년부터 2012년까지 17년간 △왜곡된 일본 교과서 지적, △한국사 傳(전) 덕혜옹주, △대마도 관련 연구, △일본 고문서를 통해 본 대마도와 독도, △임진왜란 코 무덤 등을 발견하고 공개해 일본 속에서 조선 역사를 찾아내는 전문 학술 인이다.


▲ 지난 11월 14일부터 일본 현지에 들어가 영국사(永國寺) 입구에 세워진 조선인 귀·코 무덤 안내판(뒷쪽은 석탑)을 설명하고 있는 김문길 박사 (사진/ 김문길 박사 제공)


앞서 김 박사는 오카야마(山) 현비젠(備前)시 가토(香登)에서 코 무덤을 발견하고 이어 2021년에는 쯔야마(津山)시 이치노미야(一宮) 마을 한복판에서 귀 무덤('이지장(耳地藏)' 간판을 발견해 공개해 오는 등 이번이 여섯 번째다.


김 박사는 "당시 도요토미의 명으로 조선인을 살육하고 전리품으로 코와 귀를 베어오라는 군령을 내렸다"고 일본 문서를 통해 밝혔다. "약 12만여 명의 조선인 귀와 코 무덤이 후쿠오카, 오카야마, 쓰시마 등 일본 전역에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김 박사는 전했다.


▲ 울산성에서 가토군(나베시마병 사가라 병)이 벤 조선인 귀·코숫자와 장소,


이번에 여섯 번째 1800명 발견은 국내 방송사와 동행해 지난 22일 일본 현지에서 처음 공개됐다. 구마모도현 히도 요시시 상국사(川縣 人吉市 永國寺) 정 문 앞에 세워진 석탑이다.


석탑에는 ‘천인총석탑’(千人塚石塔)으로 새겨져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란 당시 휘하 장수에게 적병의 귀와 코를 베고 옮겨 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소금에 절여 목록을 제출하도록 했다.


특히 귀코 숫자와 조선 땅 어느 곳에서 벤 것이며, 누가 벤 것인지 낱낱이 기록하여 진상하라는 명에 진사 후 이곳에 묻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김 박사는 "간판에 천인 총 석탑(이총)이라 표시되어 조선인 1000명이라 할 수 있으나 이는 숫자가 많다"라는 의미고 기록을 살펴보면 1800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원래 상국사 절 정문에 귀·코무덤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정문밖에 옮겨졌고 간판옆에 석탑만 세워져 있다. 오이타현大分 향토 사학자 아카미네赤嶺 忠씨 역시 “여기에 조선인 1800명이 묻혀있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김 박사는 이곳 귀·코의 당사자는 울산지역 조선인으로 추정한다.


당시 왜장 '사가라'의 전투 동선을 살펴보면 1593년부터 부산 동래 전투를 시작으로 울산 성을 조성하고 온양, 경주, 영천, 안동, 강원도를 거쳐 정유재란 때 한양에서 명군에 밀려 울산 성으로 회귀해 이곳에서 전라도를 지원하는 한편 울산을 전투 본진으로 삼은 '사가라' 장군은 귀·코를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보관했다. <『청정기』, 『가토문전 청정공행장』에 기록>


▲ (윤달세「귀무덤에 얼마나 귀가 묻혀있을까」57p, 『조선인 귀·코무덤을 다시 생각하다』 2007,11,27일)


기록에는 조선인의 귀 코 숫자는 2만4725명이다. 그중에 ( )로 표시된 것은 가토 자신이 벤 17567명이고 그 외에 숫자는 나베시마와 사가라 장수가 벤 것으로 7158명이다.


오다 가즈요시太田一吉장군이 벤 기록(『조선기』)을 보면 '사가라' 장군이 벤 숫자는 함경도에서 귀머리 수십 개와 남원성에 코 35명이 명시되어 있고 울산 성에서 470명을 벤 기록이다.


김 박사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당시 울산 전투에서만 가토기요마사 왜장은 2만 4725명이라 기록했고 오타가즈요시 왜장은 1만 7033명이다.


이번에 확인한 『가토기』, 『가토전기 청정행전기』에는 나베시마와 사가라가 벤 울산 조선인 7158명이 된다는 것인데 사가라가 벤 것이 1800명이라는 안내 간판을 확인한 것이다. 이를 울산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다.


▲ 천인총 석탑(이총)으로된 제목은 조선인 1000명이라 할 수 있으나 김 박사는 ˝이는 숫자가 많다˝라는 의미고 기록을 살펴보면 1800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김문길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슬픈 역사를 간직한 귀·코 무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김 박사는 앞서 지난 9월 1일 일본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아 「관동대지진 진실 공개 기획」 특집으로 일본의 조선인 학살 만행 비밀자료를 공개해 국내·외 큰 화제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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